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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의 별이 떠나갈 때 #05] Natalie Cole : Farewell, Unforgettable Sophisticated 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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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정보

고인이 된 아버지의 목소리와 듀엣으로 부른 「Unforgettable」(1991)의 메가 히트로 (이 노래가 담긴 『Unforgettable... with Love』은 3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자랑한다) 기억되는 Natalie Cole은 이 노래의 성공이 오히려 그녀가 이룩한 음악세계를 가린 면이 없지 않다. Frank Sinatra와 맞짱 뜰 수 있는 몇 안 되는 크루너이자 재즈 싱어, ‘위대한’ Nat King Cole과 Duke Ellington의 빅밴드에서 노래하던 Maria Hawkins Ellington 사이에서 태어난 Natalie Cole은 6살 때 이미 아빠와 함께 노래하며 주목 받았다. 콜은 의심할 바 없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뮤직 동네의 로열패밀리 출신이었다. 그녀의 집에는 재즈, 블루스, 소울의 명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어린 Natalie는 그들의 음악을 눈앞에서 경험하며 흡수할 수 있었다. 또 자신의 세대에 맞게 Janis Joplin과 같은 록까지 섭렵해나갔다. 유복하던 그녀의 삶에 닥친 첫 시련은 사춘기에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딸에 대한 사랑이 애틋했던 아버지는 언제나 Natalie Cole의 뜻을 존중해줬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갈망과 어머니의 기대 속에서 몇 개의 대학을 옮기며 방황하던 그녀는 USC에서 아동심리로 학사 학위를 받자마자 클럽 무대로 뛰어들었다.



아빠와의 단란한 한 때


아버지의 후광으로 쉬이 유명 클럽들을 차근차근 접수해나가던 Natalie는 마침내 1974년 아버지가 오랜 세월 몸 담았던 캐피톨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작곡가 팀 Chuck Jackson과 Marvin Yancy의 조력을 받아 『Inseparable』(1975)를 발표한다. 앨범의 대성공과 함께 Natalie는 단박에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녀는 1976년 2월 그래미에서 “최우수 여성 R&B 퍼포먼스”상과 “최우수 여성 신인”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그 중 “최우수 여성 R&B 퍼포먼스”부문은 8년간 내리 Natalie의 우상이던 Aretha Franklin이 독식해온 아성의 영역이었다. 8년 연속 수상의 신화를 무너뜨린 Natalie의 기세는 말 그대로 ‘화려’했다. 1970년대 내내 Natalie는 남편이자 작곡가 겸 프로듀서 Marvin Yancy와 함께 어반 스타일을 이끄는 부동의 R&B 스타였다. 화려한 보컬 테크닉과 폭발적인 무대 매너, 심상찮은 작곡 실력까지 완벽해 보이던 그녀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학 시절 처음 손대기 시작한 약물은 Natalie의 내면부터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혼 후 더욱 약물에 빠져들던 그녀는 끝내 재활시설로 향해야 했고, 기나긴 슬럼프가 시작되었다. 『Everlasting』(1987)에 수록된 (Bruce Springsteen의 싱글을 커버한) 「Pink Cadillac」의 히트로 재기에 성공기 전까지 1980년대의 Natalie는 무대나 스튜디오보다 재활원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이어진 『Good to Be Back』(1989)의 상업적 성공은 Natalie에게 확실히 자신감을 회복시켜줬다. 그러나 Natalie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가 선택한 다음 행보는 새로운 테크닉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과 로열패밀리의 인적자본(?)을 이용한 것이었다. 아버지 Nat King Cole의 목소리를 소환하여 스튜디오에서 가상의 듀엣을 시도한 「Unforgettable」이 수록된 『Unforgettable... with Love』로 Natalie는 《1992 Grammy Award》에서 “올해의 노래”, “올해의 음반”, “최우수 팝 퍼포먼스”를 휩쓸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 곡을 프로듀싱한 Tommy LiPuma는 이후 콜의 음악 생활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구원투수처럼 도움을 주는 인물이 되었다..



신기술과 감성이 이룬 절정의 조화


이 작품의 초대형 히트 이후 Natalie의 음악 어디에서도 초기와 같이 날카롭고 활력 넘치는 훵키 R&B 싱어의 모습을 선보이거나 록까지 넘보던 야심가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다. 이후 Natalie는 아버지의 흔적을 쫓아 보사노바 선집을 발표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대형 공연과 캐롤 음반을 발매하는 정통파 팝/재즈 가수가 되었다. 2000년대 급격히 건강이 악화 된 그녀는 신장이식과 투석을 받으면서도 『Still Unforgettable』(2008), 2009년 겨울 녹음한 라이브 『The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2010), 『Natalie Cole en Español』(2013) 등을 발표하며 마이크 앞을 떠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팝과 클래식 모두에 정통했던 막내 외삼촌이 릴테이프에 녹음해 놓았던 「This Will Be」(1975)가 Natalie에 대한 첫 기억이다. 이 얘기는 최소한 나에게 있어 진정한 Natalie Cole의 모습은 폭발하던 내면의 열정이 그대로 목소리로 구현되던 패기만만하던 20대 시절의 음악이라는 것이다. 「Unforgettable」과 이후의 음악이 그녀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그녀의 초기 작품들을 다시 들어보라 권하고 싶다. Aretha Franklin과 Whitney Houston 사이를 잇는 R&B 머신이던 시절의 목소리를 말이다. 비범했던 팝/재즈/소울 가수에게 안녕을 고하는 맘이 자꾸만 짠해지는 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후광에 기대기도 했지만, 평생 그 그늘에서 고민해야 했던 그녀의 평범한 약함(!)이 자꾸 밟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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